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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18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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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병세는 1827년에 태어나 1905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859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의주부윤,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노론에 속했다. 갑오개혁 이후 은둔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을사오적 처형을 상소했으나 실패하고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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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1827년)
기본 정보
한자趙秉世
한글조병세
가타카나チョ・ピョンセ
인물 정보
생몰년1827년 ~ 1905년
경보(敬甫)
본관풍양 조씨(豐壤 趙氏)
관직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의정부좌참찬
규장각제학
홍문관제학
예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찬성
좌찬성
의정부 찬정
의정부 좌의정
기타시호는 문충(文忠)

2. 생애

조병세는 1859년(철종 10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77년 종2품, 1887년 정2품으로 승진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1889년 우의정, 1893년 좌의정을 역임하며 노론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가평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상소하였으나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민영환 등과 을사늑약 파기를 주장하다 일본군에 의해 해산되자 이에 불복하여 자결하였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이 수여되었다.

2. 1. 관직 생활

1859년 철종 치세에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고, 1877년 종2품으로 승진한 후 승정원 승지, 평안도 의주부윤, 이조 참판, 의정부 유사당상,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887년 정2품으로 승진하여 공조, 예조, 이조 판서를 거쳐 1889년 우의정, 1893년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당파 정치에서는 노론에 속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정치 형태가 변경되자 사직하고, 한동안 가평군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2. 2. 갑오개혁과 은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정치 형태가 변경되자 사직하고, 한동안 가평군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1]

2. 3. 을사늑약 반대와 자결

1905년 일본 제국대한제국 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늑약을 체결한 조선 측 정치가 5인(후일의 을사오적)의 처형을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나,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1] 이후 민영환 등과 함께 궁정에 남아 을사늑약 파기를 주장하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에 불복하여 자결하였다.[1]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1]

4. 가족 관계

증조부조명철 (趙命喆, 1754~?) -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조부조진영 (趙鎭永, 1775~?) - 1807년 진사 합격. 이조참판 추증.
아버지조유순 (趙有淳, 1803~?) - 홍천 현감(洪川縣監). 이조판서 추증.
어머니대구 서씨(大丘徐氏) - 1795년 진사 서직수 (徐稷修, 1760~1823)의 둘째 딸.
배우자광산 김씨(光山金氏) - 1819년 생원, 포천현감 김준현 (金準鉉, 1793~?)의 딸
아들조태희 (趙台熙, 1857~?) - 1874년 진사 합격.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 추증.
손자조중목 (趙重穆, 1874~?) - 1893년 문과 급제. 탁지협판, 경기도관찰사. 궁내부 특진관. 생부 조용희 (趙用熙).
동생조병창 (趙秉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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